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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소개 총회역사 설립배경

설립배경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설립배경을 안내해드립니다.

제2장 총회의 창립

01
총회의
조직

1) 총회의 창립과 선교

역사적인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가 1912년 9월 1일 상오 10시 30분에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개회됐다. 총대는 한국인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모두 221명이었고, 당시 교인 수는 12만 명에 달했다. 초대 총회장에 한국 목사가 아닌 언더우드가 선출된 것은 그의 공로와 지도력의 결과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한국인 지도력이 대거 투옥된 상황에서 교회와 총독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창립총회는 새 고퇴를 사용했다. 이 고퇴는 요한계시록의 7개 교회와 총회산하 7개 노회를 상징하는 7가지 다른 나무조각들로 만들었고, 그 위에 세 개의 은고리를 둘렀다. 창립총회에서 전도국은 전도주일을 지킬 것과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청원했고 제2회 총회에서 중국의 산동 지역에 중국어로 사역할 수 있는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등 3인의 선교사 파송을 결의했다.

 

2) 총회의 성장

장로교회는 1905년까지 완만이 성장했다. 교인 37,407명, 세례교인은 11,061명으로 세례교인 비율은 30%였다. 1905~1910년 사이에 빠르게 성장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1907년 대부흥운동, 그리고 망국적 위기감(을사늑약, 정미조약)이 교회 성장의 주요인이 됐다. 1910~1911년은 소폭 성장했다. 이 시기 교회는 침체기를 맞았고 100만명구령운동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912~1914년 교세는 심각하게 감소했다. 105인 사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등의 여파였다. 반면 세례교인의 숫자는 서서히 증가했다. 외부적 환경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히 성도들을 훈련하고 있었다. 1914년 교인 수의 감소(121,108명)와 세례교인의 증가(60,047명)로 인해 세례교인 비율은 50%에 달했다. 1916~1918년 장로교회가 성장하는 시기에 노회 분립이 일어났다. 1918년 교세는 16,909명이고 세례교인은 68,506명으로 세례교인의 비율은 42.6%였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한국교회는 민족독립운동과 애국운동에 더 깊이 공헌할 수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박해를 받으면서 교인 수가 감소했다. 그러나 1921년부터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3) 총회의 연합사업

(1) 조선주일학교연맹(1912)
한국의 주일학교는 1890년경 장년 성경공부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1907년 서울 연동교회, 평양 장대현교회, 선천 북교회, 전주 서문교회 등에서 ‘소아회’(小兒會)를 조직하고 성경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어린이 주일학교의 시작이다. 1911년 세계주일학교연맹 특사의 내한 이후 1912년 2월 ‘조선주일학교 연맹’ 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세계연맹의 원조비로 만국통일주일공과를 편찬 발행하고 1913년 주일학교전국대회를 개최하여 14,700명이 모였다. 1915년에 주일학교교사양성법을 인쇄 배포했고 주일학교제도의 표준을 정했는데 1년 단위 성경공과를 예비하고, 장년반(21세 이상), 유년반(14-20세), 소아반(1-13세)을 분류했다. 또한 주일공과를 위해 매주 교사회를 열도록 했다. 1917년 「기독신보」에 주일학교 양성법을 게재하였고, 개신교선교연합공의회는 10월 7일을 주일학교 진흥주일로 정했다. 1918년에 총회는 모든 사경회 기간 중에 주일학교 양성법을 교육하도록 하였고, 각 노회는 주일학교협의회를 조직했다.

(2) 기독신보(1915)
1905년 개신교선교통합공의회가 조직되면서 장·감 양 교단은 7월 1일에 연합으로 「그리스도신문」(1907년 예수교신보로 개칭)을 발행했지만 교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양 교단이 성장하면서 장로교의 「예수교회보」(1910)와 감리교회의 「그리스도회보」(1911)로 분립했다. 1915년에 「예수교회보」폐간 이후 장·감 양 교단은 다시 연합하여 「기독신보」(1915-1937)를 발간했는데 개신교선교연합공의회의 6개 선교회 공동소유 신문으로서 당시 총독부의 어용지를 제외한 국내유일의 신문으로 큰 공헌을 했다.

(3)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1918)
1912년 총회창립 이후에 장·감 양 교단 사이에 연합정신이 다시 살아났다. 두 교파는 ‘백만명구령운동’(1911)에서 협력했고, 동경의 제일연합교회 목회자 파송에 협조하고 있었으며, 연합신문 「기독신보」(1915)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문서운동과 병원, 학교에서 다시 연합하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1916년 총회는 장감연합공의회 설립에 찬동하고 협의 위원을 선임했고, 1917년 총회는 장감연합협의회규칙을 채택하고 1918년 2월 26일 서울 기독청년회회관에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Korean Church Federal Council)를 창립했다. 그 구성원은 장로교회와 조선미감리회와 조선남감리회의 3개 교단이었다.
02
총회의
신앙고백

1) ‘12신조’의 채택

1907년 한국 장로교회가 독노회를 조직할 때 완전한 형태의 헌법을 갖추지 못하고 간단한 형태의 신조와 규칙을 준비했다. 독노회는 1910년까지 규칙을 보강했고 ‘죠션쟝로교회신경’(12신조)과 ‘죠션예수교쟝로회규측’을 준비했다. 한국 장로교회 창립총회는 이 신조와 규칙을 논의 없이 채택했다. ‘12신조’는 1904년에 인도에서 12개의 상이한 장로교회 및 개혁파 교회들을 하나로 연합해서 인도 장로교회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신조로서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표준을 세우고 목사, 강도사, 장로, 집사가 임직할 때 승인할 신조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그 내용은 서문을 제외한 거의 그대로 수용했는데 장로교선교사들은 “인도와 조선뿐 아니라 아시아 모든 장로회가 이 신경을 다 쓰기를” 희망했고 그것을 통해 장로교회들이 에큐메니칼 연대를 갖기를 원했다.

 

2) 규칙의 채택

1907년 독노회는 ‘죠션예수교쟝로회규측’를 채택했는데 제4조 4항 총회의 직무와 권리를 규정해 놓음으로서 독노회가 발전하여 총회가 될 것을 미리 준비했다.

 

3) 총회의 출판물

총회의 조직이 커지고 규칙이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총회 출판물들이 간행됐다. 「목사안수·위임, 장로·집사의 장립, 세례에 필요한 문답서」, 「혼례 문답서」, 장로회 정치, 권징조례, 규칙과 교회사기,「장로회 예식서」등을 출판했고, 장로회신학교 학보잡지 「신학지남」을 창간했다.
03
장로교회의
사회책임

1) 일제의 장로교회 탄압

한일병탄 이후 총독부는 한국교회를 식민지 동화정책의 큰 위험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국제적 관계망을 가지고 있고 외국 선교사가 관계하는 한국교회를 물리적으로 직접 탄압하는 것은 어려웠다. 일제는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 교묘히 교회를 탄압했는데 첫째로 ‘개정사립학교 규칙’을 통해 기독교 사립학교들을 무력화하고, 둘째로 ‘포교 규칙’을 통해 교회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하고, 셋째로 교회 지도자들을 고문해서 총독 암살모의 혐의를 조작해 탄압했던 105인 사건이었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 1차 대상은 장로교회였다.

 

2) 3·1운동 참여

3·1운동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염원하는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 기독교인들은 3·1운동의 준비과정, 점화단계, 전국적 만세운동의 진행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임시정부와 국내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과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일제의 민족 탄압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했고, 또한 기독교인들은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운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장로교회는 3·1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당시 서울에 뿌려진 ‘독립단통고문’에는 기독교의 평화적 비폭력 저항운동이 3·1운동의 기본정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립단 제군이여 무슨 일을 하던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치지 말라. 이는 야만인의 하는 짓이니 독립의 중심 뜻을 손해나게 할 뿐인즉, 각자 주의 할 일이다. 신도는 매일 3시에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고 매일 성경을 읽되 일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가면 읽을 것이다.”

3)3·1운동 준비과정의 기독교 지도자 24명 성명(연령 교직·직책 기타소개)

*표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길선주(52 장로교 목사 평양 장대현교회)
*김병조(44 장로교 목사 3·1운동 발발 직후 상해로 망명)
*양전백(51 장로교 목사 선천 북교회, 증경총회장)
*유여대(42 장로교 목사 의주동교회)
*이명룡(48 장로교 장로 덕흥교회)
*이승훈(56 장로교 장로 정주 오산교회, 오산학교 설립자)
*이갑성(22 세브란스병원 직원 세브란스병원교회 집사)
*김창준(31 감리교 전도사 종교감리교회 전도사)
*박동완(35 감리교 전도사)
*박희도(31 YMCA 간사 종로감리교회 전도사)
*신석구(46 남감리교 목사 수표교교회)
*신홍식(49 감리교 목사 평양 남산현교회)
*오화영(41 남감리교 목사 종교감리교회)
*이필주(52 감리교 목사 정동제일교회)
*정춘수(45 남감리교 목사 원산 상리감리교회)
*최성모(47 감리교 목사 해주 남본정교회) 함태영(48 장로교 장로 휴직 판사,
     세브란스병원교회)
안세환(28 평양야소교서원 총무 105인 사건 옥고, 장로교 신도)
현상윤(28 중앙학교 교사 장로교 신도)
김세환(32 수원 삼일여학교 학감 감리교 신도)
정노식(30 무직 장로교 신도, YMCA 회원)
김도태(29 명신학교 교사 장로교 신도)
김지환(29 남감리교 전도사 개성 남부교회, 관서학원 신학교졸)
김원벽(27 연희전문학교 3학년 장로교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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